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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광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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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광무제는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신나라의 멸망 후 후한을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한 황제이다. 그는 왕망의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거병하여 녹림군과 연합, 경시제를 옹립했으나 이후 하북 지역을 평정하고 25년에 후한을 건국했다. 광무제는 검소한 통치와 유교 진흥, 대외 관계 확립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켰으며, 흉노, 고구려, 왜 등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맺었다. 그의 치세는 200년 동안 이어진 후한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검소함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한 통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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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광무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한 광무제
광무제, 당나라 화가 염립본(600–673)의 그림
유수(劉秀)
문숙(文叔)
묘호세조(世祖)
시호광무황제(光武皇帝)
존호예조유공이종유덕광무중흥고묘칭세조(禮祖有功而宗有德光武中興故廟稱世祖)
설명《예기》에 조(祖)는 공이 있음을, 종(宗)은 덕(德)이 있음을 〔뜻한다〕. 광무는 〔한(漢)나라를〕 중흥하였으므로 묘호를 세조라 칭하였다.
출생일기원전 5년 1월 15일
출생지지양 현, 천류 군
사망일57년 3월 29일 (62세)
사망지뤄양
능묘원릉
통치 정보
정치 체제황제
왕조후한
재위 기간25년 8월 5일 – 57년 3월 29일
즉위일25년 8월 5일, 황제로 칭함. 36년 12월 25일 청두 함락 후 중국 전체 통치
이전 통치자경시제
후임 통치자명제
연호건무(建武): 25년–56년
건무중원(建武中元): 56년–58년
가족 관계
아버지유흠
어머니번씨
배우자폐황후 곽씨
광렬황후
자녀유영, 초왕
명제

2. 생애

유수는 전한 경제의 6대손으로, 현재의 샹청 부근인 허난성 난둔현(南頓縣)의 현령(縣令, 수장)이었던 유흠의 아들이었다. 유흠은 쥐루군(鉅鹿都尉)의 군사 사무를 담당하는 부지사였던 유회의 아들이었고, 유회는 위린군(鬱林太守)의 태수였던 유외의 아들이었다. 유외는 후작 충릉절후(舂陵節侯) 유매의 아들이었고, 유매는 창사정왕 유발의 아들이었다. 창사왕은 전한 무제의 형제였으며, 한경제와 당희의 아들이었다. 유발의 후손이었던 유수는 경시제(更始帝)와 3촌 사촌 관계였다.[30]

유흠은 번중(樊重)의 딸과 결혼하여 유연, 유중, 유수 세 아들을 두었다. 유흠이 일찍 죽자 형제들은 숙부인 유량에게서 자랐다. 유연은 야심이 많아 왕망이 서기 8년에 한나라 왕좌를 찬탈하고 신나라(新)를 세운 이후 한나라 복원을 위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반면 유수는 신중한 성격으로 농부로 사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의 매형이자 누이인 유원의 남편 등신은 유수라는 이름의 사람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그에게 더 큰 야심을 갖도록 격려했다.[31]

22년, 제국 전체가 왕망의 무능한 통치에 반기를 들자 유연은 반란을 준비했다. 이통, 이예와 함께 남양군 (오늘날의 난양, 허난성) 태수를 납치하고 백성들에게 합류를 요구하려 했으나, 고향 충릉의 젊은이들은 반란 소식에 두려워했다. 그러나 유수가 반란에 참여한다는 소식에 마음을 바꾸었는데, 신중한 유수마저 참여하니 신중하게 계획된 반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획이 유출되어 이통과 이예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가족은 몰살당했다. 유연녹림군의 신시병, 평림병을 설득하여 합류하게 하고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완성을 공격했으나 큰 손실을 입었고, 유연, 유수, 유백희는 살아남았지만 유중과 유원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유연은 하강병과 합류하여 23년 신나라 군대에 대승을 거두고 남양군 태수 견부를 죽였다.

2. 1. 출생과 성장

전한 경제의 아들 장사정왕 유발의 5세손으로, 남돈령(南頓令)으로 남돈군에 추증된 유흠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몹시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30],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陰麗華)[31]" [仕官當至執金吾, 娶妻當得陰麗華] 라는 정도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다니던 평범한 종실의 한 사람이었다.

유수(劉秀)는 서한 경제의 6대손이었다. 그는 현재 샹청 부근, 허난성 난둔현(南頓縣)의 현령(縣令, 즉 수장)이었던 유흠(劉欽)의 아들이었다. 유흠은 쥐루군(鉅鹿都尉)의 군사 사무를 담당하는 부지사였던 유회(劉回)의 아들이었다. 유회는 위린군(鬱林太守)의 태수였던 유외(劉外)의 아들이었다. 유외는 시호가 후작 충릉절후(舂陵節侯)인 유매(劉買)의 아들이었다. 유매는 창사정왕으로 알려진 유발(劉發)의 아들이었다. 창사왕은 전한의 유명한 황제인 무제의 형제였으며, 한경제와 당희의 아들이었다. 유발의 후손이었던 그는 또한 경시제(更始帝)와 3촌 사촌 관계였다.

유흠은 번중(樊重)의 딸과 결혼했고, 부부는 유연(劉延), 유중(劉仲), 유수(劉秀) 세 아들을 두었다. 유흠은 일찍 죽었고, 형제들은 숙부인 유량(劉良)에 의해 길러졌다. 유연은 야심이 많았고, 왕망이 서기 8년에 한나라 왕좌를 찬탈하고 신나라(新)를 세운 이후 끊임없이 한나라를 복원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고려했다. 반대로 유수는 신중한 사람이었고 농부로 사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의 매형이자 누이인 유원(劉元)의 남편인 등신(鄧晨)은 유수라는 이름의 사람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믿고 끊임없이 그에게 더 야심을 갖도록 격려했다.

유수는 경제의 일곱째 아들로, 장사왕이 된 유발의 후손이며, 연주진류군 제양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매우 신중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후에 동경하던 음려화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2. 2. 왕망의 난과 거병

광무제


왕망선양을 통해 을 건국하자, 주나라 시대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현실을 무시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었고, 흉노, 서강, 고구려 등 주변 여러 국가와 종족들의 반감을 샀다.[32] 또한, 국내 각지에서 반란이 발생했는데, 그중에서도 천봉 5년번숭 등이 지도자가 되어 거병한 적미군, 동시기에 왕광이 녹림산을 거점으로 거병한 녹림군이 세력을 얻었다.

지황 3년 겨울, 유수의 형인 유연이 거병하였다. 이 군대는 충릉군이라고 불렸으며, 처음에는 뜻대로 병사를 모으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신중한 성격으로 평판이 높았던 유수가 참여하자, 유수의 판단을 믿고 반란에 참여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거병 당시 유수는 가난하여 말을 살 수 없어 소를 타고 다녔다.[34]

충릉군은 이윽고 녹림군과 합류했지만, 곧 녹림군은 역병이 만연하여, 남양을 거점으로 하는 신시군과, 남군을 거점으로 하는 하강군으로 분열되었다. 신시군은 남양의 호족인 평림군 (이 군에는 유수의 본가에 해당하는 유현이 참가했다)과 유연의 충릉군과 연합했다. 이후 이 연합군이 하강군을 다시 흡수했고, 유연이 육양에서 신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연합군이 완성을 포위한 후, 신 황제를 옹립하기 위해 신시·평림군 부장들이 협의를 진행했다. 유연 옹립 움직임도 있었지만, 실적이 있는 유능한 인물을 옹립하면 자신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두려워한 신시·평림군 부장들은 이를 기각하고, 범용한 인물로 여겨지던 유현이 경시제로 옹립되었다.

2. 3. 경시제 정권

왕망(周) 시대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실시하면서 민심을 잃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흉노·서강(西羌)·고구려 등 주변 국가와 민족들의 반감도 샀다.

천봉 원년, 낭야에서 여모(呂母)라는 노파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사재를 털어 반란을 일으켰다. 여모는 현령을 죽인 뒤 사망했지만, 군세는 해산하지 않고 천봉 5년 동향 사람인 번종(樊宗)의 거병에 합류해 적미군(赤眉軍)이라 불렸다. 당시에는 "차라리 적미군을 만날 망정 태사군은 만나지 말고, 태사를 만나지 않더라도 경시군이 모두 죽일 것이다(寧逢赤眉, 不逢太師[32]. 太師尙可, 更始殺我.)"라고 야유했다고 한다.[33] 같은 시기에 왕광(王匡)이 빈민들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을 거점으로 반역을 일으켜 녹림군(綠林軍)이라고 불렸다.

지황 3년 겨울, 형 유인(劉縯)이 거병하였다. 신중한 성격에 평판도 좋던 동생 유수가 합류하자 유수의 판단을 믿고 반란에 참가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 반란군은 용릉군(舂陵軍)이라 칭했다. 유수는 소를 타고 다니다가 녹림군에 합류한 뒤에야 말을 타게 되었다고 한다. 녹림군은 역병으로 인해 남양을 거점으로 하는 신시군(新市軍)과 남군을 거점으로 하는 하강군(下江軍)으로 나뉘었다. 신시군은 평림군(平林軍, 여기에는 유수의 본가 혈통인 유현(劉玄)이 가세했다)이나 유인의 용릉군과 연합하였는데, 나중에 이들이 다시 하강군을 흡수하고 유인은 육양(淯陽)에서 관군을 격파했다. 연합군이 완성(宛城)을 포위한 뒤, 녹림군의 부장들은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자 협의를 벌였다. 하강군과 남양 호족을 중심으로 유인을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나, 평림군과 신시군의 부장들은 유현을 옹립하였다(경시제).

경시 원년 여름, 경시제 토벌을 계획한 왕망은 낙양(洛陽)에서 백만(전투병 42만, 나머지는 수송병)이라는 대군을 출진시켰다. 그러나 왕망은 군사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했고, 조정군은 63파나 되는 병법가(兵法家)를 동행시키면서 맹수를 거느리는 등의 어긋난 편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망군은 유수가 거점으로 삼고 있던 곤양성(昆陽城)을 포위 공격하지만, 유수는 밤을 틈타 13기만을 거느리고 곤양성을 탈출해, 가까운 현에서 3천의 원군을 모아 곤양을 포위한 군사와 맞섰다. 왕망군은 총대장 비진후(丕進侯) 왕심(王尋)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요격했지만 유수와 그 부하들의 분투로 대패하였다(곤양 전투). 곤양에서의 승리를 전후해 유수의 형 유인도 완성(宛城)을 함락시켰다.

경시제는 유인, 유수 형제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견제에 나섰다. 경시제의 즉위에 반대했던 유인의 부하 유직(劉稷)이 경시제의 벼슬을 사양하자 경시제는 그를 반역으로 몰아 죽이려 했고, 유인이 이에 부하인 유직을 옹호하고 나서자 경시제는 이를 트집잡아 유인을 처형했다. 유수는 완성에 도착하여 경시제에게 형의 결례를 사과하고, 형을 위해 상복도 입지 않았으며 조문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사건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 등 자신도 재앙에 휘말리는 일이 없게 하려 애썼다.

곤양(昆陽)과 완(宛)에서의 전승이 알려지자 호족들이 경시제의 군에 합류했고, 단기간에 일대 세력으로 성장한 경시제의 군사는 낙양과 장안을 함락시키고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낙양이 도성(都城)으로 정해질 때까지 유수는 경시제와 측근들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중앙 정계에 나서지 못했으나, 대사도 유사(劉賜)가 "여러 집안의 자제로서 문숙(유수)이 쓸 만 하다(諸家子獨有文叔可用)"[35]고 추천하면서 유수는 하북 부임을 명받고, 유수에 대한 감시도 풀렸다.

이후 경시제의 정치가 문란해져 민심을 잃게 되자 유수에게도 자립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2. 4. 하북 평정과 후한 건국

경시 원년 겨울, 유수는 하북으로 향했다. 한단을 떠나 북상했을 때, 한단에서 왕랑한 성제의 사생아라고 칭하며 유림, 이육 등과 거병하여, 유수의 목에 10만 호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 했다. 이 때문에 유수는 등우, 왕패, 풍이 등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하북을 전전하게 되었다. 이는 혹독한 행군이 되어 혹한 속에서 풍이가 장작을 모으고 등우가 모닥불을 피우며 콩죽과 밀밥으로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왕랑을 거부하고 유수의 보호를 요청하는 신도군의 태수 임광과 그 부하 이충만수, 화성군의 태수 비동 등이 유수를 맞이하고, 지방 호족 유식, 경순이 진영에 합류한다. 임광, 이충, 만수, 비동, 유식, 경순은 후세에 운대이십팔장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유수는 왕랑의 부하로 10여 만의 병력을 거느린 진정왕 유양(『한서』에 의함. 『후한서』는 "유양"으로 기록)에 대한 공작을 시작하여, 유양의 여동생이 호족 곽창에게 시집가 낳은 딸, 즉 유양의 조카 곽성통(후의 곽황후)을 유수가 아내로 맞이함으로써, 유양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왕랑과 대치하는 가운데, 정예 오환족 돌기병을 거느린 어양군상곡군이 유수 측에 붙어, 후세의 운대 28장의 한 사람으로 불릴 오한, 개연, 왕량(이상 어양), 경단, 구순, 경엄(이상 상곡) 등을 파견하여 유수와 합류했다. 이로 인해 세력을 키운 유수군은 왕랑군을 격파, 경시 2년 여름에는 한단을 함락시키고 왕랑을 쳐 죽였다.

경시 2년 5월, 유수의 세력을 두려워한 경시제는 유수를 '''소왕'''(蕭王)으로 봉하여 군사를 해산시키고 장안으로 불러들였지만, 유수는 부하 경엄의 조언을 받아들여 하북의 평정이 완료되지 않았다며 이를 거부하고 자립하는 길을 택했다.[36] 그 뒤 동마군(銅馬軍)이라는 지방 세력군을 격파하고 그 병력까지 손에 넣은 유수의 군사는 수십 만을 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건무 원년 (25년), 하북의 실력자가 된 유수는 부하들로부터 황제로 즉위하라는 상주를 받았다. 유주에서 개선하는 도중에 두 번이나 사양하다가 세 번째 요청에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하고, 『적복부(赤伏符)』라는 참문(讖文)을 부기한 네 번째 요청으로 즉위를 수락하여 6월에 즉위, 연호를 건무라 했다. 영천군여남군을 장악하고 있던 친척 아저씨 유무가 광무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항복해 왔다. 이해에 경시제는 서쪽으로 온 적미군에게 항복한 뒤 살해되었다. 적미군도 장안 및 그 주변을 약탈하다 식량이 떨어지자 산둥으로의 귀환을 꾀했는데, 건무 3년 (27년), 광무제가 파견한 대사도 등우·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풍이가 적미군을 공격하였다. 처음에는 패배했던 풍이가 군사를 정비해 적미군을 격파하고, 서쪽으로의 퇴로를 끊고서 동쪽 의양(宜陽)에서 기다리고 있던 광무제의 군은 병량이 다한 적미군을 전투 없이 항복시켰다.

2. 5. 천하 통일

25년(건무 원년), 하북의 실력자가 된 유수는 부하들에게 황제 즉위를 요청받았다. 유주에서 개선하는 도중에 두 번 사양했으나, 세 번째 요청에는 "생각해보겠다"라고 대답했으며, 『적복부』라는 참언을 덧붙인 네 번째 요청에 즉위를 수락하고 6월에 즉위하여 후한을 건국, 연호를 건무로 했다.

이 해, 경시제는 서쪽에서 온 적미군에게 항복한 뒤 살해되었다. 적미군도 장안과 그 주변을 약탈하고 식량이 떨어지자 산둥으로 돌아가려 했다. 27년 (건무 3년), 대사도 등우·정서대장군 풍이가 이끄는 후한군은 적미군을 공격하여, 패배한 풍이는 군사를 정비해 적미군을 격파하고 서쪽 퇴로를 끊었다. 동쪽 의양에서 기다리고 있던 후한군은 병량이 떨어진 적미군을 전투 없이 항복시켰다.

30년 (건무 6년)에는 산둥을 평정, 33년 (건무 9년)에는 농서를 공략하여 외효는 병들어 굶어 죽고, 뒤를 이은 아들 외순을 항복시켰다(34년 건무 10년). 36년 (건무 12년)에 공손술을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을 달성했다.

3. 통치 정책

광무제는 검소하고 효율적인 통치와 관대한 법 적용으로 유명했다. 38년, 신하 양통(梁統)은 서한 말기의 가혹한 형법을 복원할 것을 제안했으나, 광무제는 다른 신하들과의 논의 끝에 이 제안을 보류했다. 그러나 그는 내궁 시종을 반드시 환관으로 임명하도록 명령했다.[7]

광무제는 제국 통일이 거의 완료된 37년에 장군들의 공적에 따라 봉읍을 재조정했다. 그는 장군들에게 넓은 봉읍을 주되 조정의 공식 직책은 주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장군들과의 마찰을 줄이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광무제는 비한족과의 관계에서도 주목할 만한 정책을 펼쳤다. 40년, 베트남에서 쯩 자매(쯩측(徵側)과 쯩니(徵貳))가 반란을 일으키자, 41년 마원을 파견하여 43년에 이들을 진압했다.[7] 북쪽의 흉노와는 대규모 전쟁은 없었지만, 흉노, 오환, 선비의 약탈로 인해 북쪽 군현의 인구가 감소하고 백성들이 남쪽으로 도망치는 상황이 발생했다.

46년, 여러 서역(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및 옛 소련 중앙 아시아) 왕국들이 사차(莎車, 야르칸트) 왕국의 지배에 고통받아 광무제에게 서한 시대의 서역 도호 관직을 재설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광무제는 제국의 국력이 약하여 서역 왕국들을 보호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거절했고, 그 결과 서역 왕국들은 흉노에 복속되었다.[7]

48년, 흉노는 계승 분쟁으로 선우 푸누(蒲奴)와 그의 사촌 비(比)가 대립했다. 비(比)가 선우를 칭하고 광무제에게 복종하면서 흉노는 분열되었고, 한나라에 대한 전쟁을 중단했다.

49년, 광무제는 마원을 파견하여 무릉군(오늘날 후난성 북서부와 구이저우성 동부)의 토착민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그러나 마원은 원정 중 사망했고, 정치적 적들의 모함으로 인해 제후 작위를 박탈당하고 사후 비난을 받았다.

3. 1. 내정

광무제는 낙양을 첫 도읍으로 정하고, 장안을 함락시킨 뒤에도 황폐해진 장안으로 천도하지 않고 낙양을 그대로 도성으로 유지했다. 한 왕조를 화덕(火德)이라 여겼던 광무제는 낙양의 ‘낙(洛)’에 들어간 수(水)자 변을 싫어해서 낙양의 이름을 락양(雒陽)으로 바꾸었다.[9] 또한 중국 통일을 전후해 노비를 해방하고,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조세를 가볍게 줄였으며 군사를 귀농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의 정책을 통해 왕조의 기초가 되는 백성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통치 기구를 정비하고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56년에 연호를 건무중원으로 바꾸고 봉선을 행했으며, 그 이듬해 붕어했다. 전한 말 이래의 혼란으로 중국은 피폐해져, 전한의 전성기에는 약 6천만 명에 달하던 인구가 광무제 시대에는 2천만 명 정도로 감소해 있었다.[10] 광무제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노비 해방 및 대사령을 몇 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자유민을 늘려 농촌 생산력 향상과 민심 확보에 힘썼다. 징병제를 폐지하고, 평소에는 농업 생산에 종사시키다가 유사시에 군사로 동원하는 둔전병(屯田兵)을 운용해, 생산과 수요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서 발생한 기근이나 변경으로의 식량 수송 문제를 완화시켰다.

백성의 신분에 대한 정책으로는 노비 해방령 외에도 35년(건무 11년)에는 "천지(天地)의 성(性)은 인(人)이 귀(貴)하다.(이 세상에서는, 사람이 존귀하다)[11]"로 시작하는 조서를 발표하여, 노비와 양민의 형법상 평등을 선언하였다. 또한 31년(건무 7년)에는 매인법(賣人法), 37년(건무 13년)에는 약인법(略人法)을 공포하여 인신매매를 규제하였다.

조세에 대해서는 여지껏 왕조의 군사 재정 부족을 이유로 수확량의 1/10을 거두던 것을 30년(건무 6년)에 전한의 제도와 같은 1/30로 하여 인민의 불만을 완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감세가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둔전 시행으로 병사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도 한몫하였다.

징병된 병사들을 귀농시킨 뒤, 39년(건무 15년)에는 경지 면적과 호적에 대한 전국적인 조사를 시행하여 인민 통치의 기초를 다지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때의 경지 및 호적 조사에서는 수도가 있던 하남이나 황제의 고향이기도 한 남양에서 부정 신고가 행해졌는데, 해당 군의 호족들이 가지고 있던 권세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조사에 불만을 품은 지방 호족이 농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왕망(王莽)이 화폐 제도를 혼란시킨 바람에 후한 초기까지 조악한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으나, 40년(건무 16년)에는 과거 한 무제 이후의 오수전 주조가 시작되어 화폐 제도도 정비되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후한 왕조의 통일 제국으로서의 실체가 거의 갖추어졌다.

광무제 치세의 통치 기구의 정비는 다음과 같다.

후한은 전한의 통치 기구를 답습해 군국제를 채용하면서도 제후왕(諸侯王) · 열후(列侯)의 봉읍은 전한에 비해 줄어들었다. 제후왕의 봉읍은 1개 군을 넘지 못했고, 공신(功臣)을 후(侯)로 봉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도 몇개 현(縣)만을 봉해줄 뿐이었다. 왕망이 폐했던 전한의 제후왕으로 광무제가 즉위하면서 지위를 회복한 자들도 37년(건무 13년)에는 열후로 격하되고, 이후 광무제의 치세에 제후왕으로 봉해진 것은 황제의 동족이었던 남양 충릉(舂陵) 유씨 일족과 황자 뿐이었다.

중앙정부에는 대사도, 대사공, 대사마삼공을 정치의 최고 책임자로 두었다. 실무상에서는 황제의 비서격인 상서(尙書)가 중용되었다. 그밖에 관제나 군제에서는 역소(役所)를 통폐합하고 필요없는 관직의 삭감을 실현하여 31년(건무 7년)에는 지방 상비군이었던 재관(材官) · 기사(騎士) 등을 없애고 노동력 부문의 민간 전환을 실현하였다. 혼란기에 임명되었던 장군도 대부분이 해임되고 소규모 상비군만을 준비하는데 그쳐 재정 부담의 경감을 도모하였다.

또한 재정 기관의 재편성으로 과거 전한에서는 황실 재정을 맡고 있던 소부(少府)의 업무를 국가 재정 기관인 대사농으로 이관시켜 황실 재정을 국가 재정에 포함시키거나,[12] 대사농 직속이었던 국가 재정의 중요한 기관인 염관(鹽官) · 철관(鐵官)을 지방 군현에 속하게 하기도 했다.[13]

광무제의 시책은 정치적 · 사상적 특색의 하나로서 유교를 진흥시켰고, 학제 · 예제(禮制)를 정비했다는 데에 있다. 29년(건무 5년) 낙양에 태학을 설치하여 유학을 강론하게 하고 14명의 오경박사를 두었으며,[14] 비슷한 시기에 각지에 사학(私学)이 마련되어 현지의 학자가 문하생을 모아 경서를 강의하게 된다.[15] 또한 관리 등용제도인 향거리선에서 효행, 청렴, 결백을 취지로 하면서도 특히 효렴(孝廉)이 중시되어, 36년(건무 12년)에는 삼공 등이 매년 일정한 수의 효렴을 천거하도록 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16] 56년(건무중원 1년)에는 낙양에 교화 · 제사 시설로서 명당(明堂) · 영대(靈台) · 벽옹이 설치되었다.

광무제가 통치의 근거로 삼은 유교는 참위설과 결합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예언 등의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짙게 가미되어 있었고 왕망도 이것을 이용하였다. 광무제는 즉위하면서 『적복부』의 예언에 따른 것 외에도 삼공의 인사나 봉선, 시행의 근거로서 참문을 쓴 사례도 있었으며, 참위설을 비판한 유학자는 등용되지 못했다.[18] 만년인 57년(건무중원 2년)에는 도참(圖讖)을 천하에 선포할 것을 명했다.

후한 시대(서기 25년-220년) 벽화로, 전차와 기병 행렬을 묘사하며, 중국 허난성, 정저우의 다후팅 묘에서 출토됨.

3. 2. 대외 관계

광무제는 적극적인 대외 관계를 펼쳐 후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동쪽으로는 30년(건무 6년) 낙랑군(낙랑국이 아님)을 다시 평정하여 군현제를 통해 직접 지배했다. 한반도 동쪽의 수장들을 현후(縣侯)로 봉하고, 남부에서 조공하러 온 사신들을 받아들여 낙랑군에 속하게 했다. 32년에는 왕망이 후(侯)로 격하했던 고구려가 후한에 조공하자 다시 왕호(王號)를 부활시켰다. 57년(건무중원 2년)에는 의 노국(奴國)에서 온 사신에게 금인(金印)을 하사했는데, 이는 에도 시대에 시가 섬(志賀島)에서 발견된 한위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으로 추정된다.[7]

서쪽으로는 35년(건무 11년) 침략해온 강족(羌族)을 마원을 시켜 물리치고, 항복한 자들은 천수(天水) · 농우(隴西) · 우부풍(右扶風) 내의 군으로 이주시켜 군현 관할 아래 두었다.[7]

남쪽으로는 40년(건무 16년) 교지(交趾)에서 일어난 쯩 자매의 반란을 마원을 보내 진압하게 하였다. 마원은 무력 행사와 함께 성곽 복원, 관개수로 정비를 통해 농업을 진흥시키고 현지의 관습법을 존중하는 등 후한의 군현제 정비에서 현지의 습속을 존중했다.[7]

북쪽에서는 왕망의 강경 외교 정책에 반발한 흉노가 세력을 더하고 있었는데, 30년(건무 6년) 광무제는 화친 사자를 보냈지만 흉노의 침략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 48년(건무 24년) 흉노가 내부 항쟁을 겪어 남북으로 분열되고 이 중 남흉노(南匈奴)가 후한에 귀순하였다(이 분열로 오환선비족도 흉노에서 이탈한다). 광무제는 49년(건무 25년)에 오환의 추장을 후왕(侯王)에 봉하고 선비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북흉노(北匈奴)는 남흉노를 약화시키고자 51년(건무 27년)에 후한에 사자를 보냈지만, 광무제는 화친을 인정하지 않고 한편으로 북흉노를 토벌할 방안도 인정하지 않은 채 비단 등을 주어 회유하는 선에서 그쳤다.[7]

광무제는 서역 왕국들이 흉노에 복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역 도호의 관직을 재설립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당시 제국의 국력이 미약하여 서역 왕국들을 보호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거절하였다.[7]

4. 평가

남조 의 원제는 『금루자』에서 제갈량의 견해를 빌려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광무제의 부장은 한신, 주발에 뒤지지 않고, 모신은 장량, 진평에 뒤지지 않지만, 광무제가 신과 같은 지모를 가지고 스스로 깊은 생각과 먼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 신하들은 난사를 미연에 방지하는 칭찬받기 어려운 공을 세우게 되었다. 반면 고조는 소략했기 때문에 장량, 진평, 한신, 주발이 (기책이나 공략과 같은) 칭찬받기 쉬운 공을 세우게 되었다."[19]

사마광은 『자치통감』에서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학을 진흥한 광무제의 뜻은 명제, 장제에게 계승되었고, 200년 후의 조조조차 두려워하여 찬탈할 수 없었으며, 하, , 삼대가 멸망한 이후, 교화에 의한 아름다운 풍습은 후한에서 가장 성행했다"고 평가했다.[20]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열조부전한 경제
현조부장사정왕 유발
고조부용릉절부군 유매
증조부울림부군 유외
조부유회추존 황제 거록부군
조모장씨추존 황비 거록부군부인
아버지유흠추존 황제 남돈군
어머니번한도번중(樊重)의 딸
제무왕 유인
노애왕 유중
황후폐황후 곽씨
장남동해공왕 유강
차남패헌왕 유보
5남제남안왕 유강
7남부릉질왕 유연
10남중산간왕 유언
황후광렬황후 음씨
4남효명황제 유장
6남동평헌왕 유창
8남광릉사왕 유형
9남임회회공 유형
11남낭야효왕 유경
후궁허미인
3남초왕 유영
장녀유홍신의공주
차녀유의왕무양공주, 생모미상
3녀유중례열양공주, 생모미상
4녀유홍부관도공주, 생모미상
5녀유예류육양공주, 생모미상
6녀유수역읍공주, 생모미상



어렸을 때부터 몹시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30],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31]"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는 평범한 종실의 한 사람이었다.

6. 기타

유수(劉秀)는 서한나라(西漢) 경제의 6대손으로, 아버지 유흠(劉欽)과 어머니 번중(樊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유흠은 일찍 죽었고, 형제들은 숙부인 유량(劉良)에 의해 길러졌다. 유수는 신중한 성격으로 농부로 사는 것에 만족했지만, 예언을 믿는 매형 등신(鄧晨)의 격려로 야심을 품게 되었다.[19]

서기 22년, 유연(劉淵)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수도 이에 가담했다. 유수는 곤양 전투에서 왕망(王莽)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경시제(更始帝) 정권에서 유연이 처형당한 후, 유수는 음려화와 결혼했다. 이후 왕랑(王郞)을 격파하고 경시제에게서 독립하여, 서기 25년 황제로 즉위하여 광무제(光武帝)가 되었다.[20]

광무제는 적미를 격파하고, 유영, 공손술 등 여러 군벌을 평정하여 제국을 통일했다. 그는 검소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펼쳤으며, 법을 관대하게 적용했다. 또한 쯩 자매를 진압하고 흉노(匈奴)와의 소규모 전투에 대처했다. 광무제는 곽성통을 폐위하고 음려화를 황후로 삼았다.[21] 서기 57년, 광무제가 사망하고 명제가 즉위했다.

광무제는 학식이 풍부하고 신중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서민 시절 여러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황제가 된 후에도 미행을 즐기는 등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전장에서는 용맹하게 싸웠으며, 항복한 병사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22] 하플로그룹은 O2a2b1a1a1a1a1 계통(Y20928)이다.[23][24]

광무제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유흠(劉欽)남돈현령
어머니번씨(樊氏)번중(樊重)의 딸
유연(劉演)
유중(劉仲)
누이유황(劉黃)호양장공주
누이유원(劉元)
누이유백희(劉伯姬)
황후곽성통(郭聖通)폐위됨
황후음려화(陰麗華)
아들유장(劉莊)음려화 소생, 제2대 황제
기타 아들10명
5명


6. 1. 등장 작품


  • 2009년 SBS 드라마 《자명고》에 등장했다.
  • 《수려강산》에서 위안훙이 연기했다.
  • 秀丽传:美丽的贤后与皇帝结下的爱|수려전: 아름다운 현후와 황제가 맺은 사랑중국어 (2016년, 중국, 배우: 위안훙)
  • 츠카모토 세이시 『광무제』 상・중・하 2003년, 고단샤
  • 미야기야 마사미츠 『초원의 바람』 상・중・하 2011년, 주오코론신샤
  • 쇼코켄 바이안 『광무대제전』 2020년, 일본 라이트 노벨, 소라출판

참조

[1] 인용
[2] 서적 Bielenstein
[3] 웹사이트 Chinese Emperor on the Yenisy? Once more about the owner of the Tashebik "Palace" http://kronk.narod.r[...] "Ethnohistory and archaeology of Northern Eurasia: theory, methodology, and the research practice" 2012-07-10
[4] 웹사이트 Houhanshu, vol. 13 http://zh.wikisource[...]
[5] 서적 Houhanshu
[6] 서적 赫遜河畔談中國歷史
[7] 웹사이트 太监原为皇帝的门客不必阉割 光武帝之后悉用阉人 http://www.stnn.cc/a[...] 2024-10-01
[8] 인용
[9] 인용
[10] 인용
[11] 인용
[12] 인용
[13] 인용
[14] 인용
[15] 인용
[16] 인용
[17] 인용
[18] 인용
[19] 인용
[20] 인용
[21] 웹사이트 汉光武帝刘秀家族祖源分析-23魔方祖源基因检测 https://www.23mofang[...] 2024-09-11
[22] 웹사이트 O-Y20928/O2a2b1a1a1a1a1a1a1a 疑似汉光武帝刘秀(公元前5年-公元57年) - TheYtree(無料分析、科学的サンプル、古代DNA)Ytree、Y-DNAツリー https://www.theytree[...] 2024-09-11
[23] 인용
[24] 인용
[25] 인용
[26] 인용
[27] 인용
[28] 인용
[29] 서적 华夏取名艺术
[30] 정보
[31] 정보
[32] 서적 학역거필록
[33] 서적 한서(漢書)
[34] 정보
[35] 서적 자치통감
[36] 서적 蕭王, 乃辭, 以河北未平, 不就徵. 始貳於更始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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